루트
현충원의 역설 루트
나라를 위해 죽은 이와, 나라를 배신한 이가 같은 언덕에 잠들어 있다
현충원 —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희생한 이들을 기리는" 자리
1955년 국군묘지로 출발해 1965년 국립묘지로 승격된 국립서울현충원. 국립묘지법 제1조는 그 설치 목적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희생한 분들의 충의와 위훈을 기리기 위해"라고 명시한다. 그런데 바로 이 언덕에 그 목적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름들이 함께 묻혀 있다 — 일제에 부역한 전력이 정부 스스로에 의해 공인된 이들, 그리고 1979년 군사반란과 1980년 광주 유혈진압에 가담한 이들이다. 이 루트는 그 이름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왜 아직도 여기 있는가"라는 질문에 현행법이 어떻게 답하는지를 따라간다.
2009년, 정부가 스스로 "친일반민족행위자"라 결정한 12명
2005~2009년 활동한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조사한 끝에 2009년 11월 1,005명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공식 발표했다. 이 중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이가 정확히 12명이다 — 국립서울현충원 7명(김백일·김홍준·백낙준·신응균·신태영·이응준·이종찬), 국립대전현충원 5명(김석범·백선엽·백홍석·송석하·신현준). 12명 중 11명이 일본군 또는 만주국군 장교 출신이며, 그중 여럿이 조선인 항일 무장세력 탄압으로 악명 높은 간도특설대 소속이었다. 이보다 훨씬 넓게,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펴낸 「친일인명사전」 등재자 기준으로는 서울·대전 두 현충원에 안장된 인원이 63명(서울에만 37명)에 이른다는 것이 시민단체의 집계다 — 정부의 "공식 결정 12명"과 민간 연구의 "친일인명사전 등재 63명"은 서로 다른 기준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둔다.
백선엽 — 다부동의 명장, 그리고 간도특설대의 중위

1943년 만주국 간도특설대에 배속돼 항일 무장세력 토벌 작전에 참여했고, 광복 후에는 한국전쟁 다부동 전투의 공으로 32세에 국군 최초의 4성 장군에 올랐다. 다부동 전투는 1사단 단독이 아니라 미 27연대(마이켈리스 대령)와의 협동 방어전이었고, 그 전공의 규모를 두고도 논란이 있다 — 박경석 등 일부 예비역 장성은 전공이 과장됐다고 비판하고, 1사단이 한때 단독으로 북한군 3개 사단급을 상대했다는 반론도 있다. 2020년 7월 사망 당시 유족의 신청으로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제1현충원인 서울이 아닌 이유는 서울현충원의 만장 상태 때문이었다는 것이 정부 설명이다). 안장 직후 국가보훈처가 안장자 정보 비고란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2009년)"이라는 문구를 명시하면서, "6·25 전쟁 영웅을 이렇게 대우하나"는 반발과 "친일 행적자가 국립묘지에 웬 말이냐"는 반발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2023년 보훈부는 이 문구를 안장 정보에서 비공개 처리했다.
김창룡 — 김구 암살 배후 의혹의 헌병, 순직으로 이장되다
일본 관동군 헌병으로 군 경력을 시작해 항일세력 첩보 활동으로 승진을 거듭했고, 광복 후 특무부대장으로서 백범 김구 암살의 배후라는 의혹을 오래 받아온 인물이다. 애초 경기 안산의 개인 묘지에 있었으나, 1998년 유족의 요청으로 국방부가 대전현충원 장군묘역으로 이장을 승인했다 — 옛 동료들과 군 장병이 참석한 안장식까지 열리고 예포가 발사됐다. 육군은 논란이 일자 "순직으로 처리돼 결격 사유가 없다"고 해명했다. 정부의 2009년 "12명 공식 결정" 명단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된 인물로, 시민단체가 매년 현충일마다 이 묘소 앞에서 항의 행동을 벌이는 대표적 장소 중 하나다.
보안사 구내의 기념사진 — 34인, 그리고 44년 뒤의 명단
1979년 12월 12일 밤 신군부가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법 연행하며 군권을 장악한 다음 날, 인사 발표 후 보안사령부 구내에서 촬영된 이른바 "신군부 34인 기념사진". 뉴스1의 2026년 조사에 따르면 이 34명 중 2명은 대통령이 됐고, 6명은 국회의원을, 14명은 대장 계급을 지냈다. 2026년 현재 12명이 생존해 있고 18명이 사망했으며 4명은 행방이 확인되지 않는다. 사망한 18명 가운데 13명이 국립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 대전 10명, 서울 3명. 지휘부에 맞서다 예편당한 장태완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의 이야기는 뒷부분에서 다시 나온다.
유학성 — "무죄추정의 원칙"으로 안장된 반란 주도자
당시 국방부 군수차관보로 반란 모의 초기부터 가담해, 반란 성공 후 요직인 제3야전군사령관으로 영전했다. 1996년 12·12 및 5·18 관련 재판에서 1심·2심 모두 유죄(징역 6년)를 선고받았지만, 대법원 상고심 재판 도중인 1997년 지병으로 사망해 공소기각 처리됐다. 한국 형사법상 사망자는 기소할 수 없고, 확정판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한다는 원칙에 따라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002호(가장 상석)에 안장됐다. 전두환은 생전 이 묘역을 꾸준히 참배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확정되지 않고 죽었다"는 이 한 가지 이유로, 그는 오늘도 국립묘지에 있다.
박준병 — 무죄 판결로 안장 자격을 지킨 "광주학살 5적"
12·12 당시 20사단장으로 반란에 가담했고, 이후 5·18 광주 진압 과정에서 그의 예하 부대가 민간인 학살에 관여했다는 것이 5월단체의 평가다. 전두환·정호용·노태우·이희성과 함께 "5·18 오적"으로 꼽히는 인물이지만, 1996년 내란수괴 재판에서 "직접적인 가담 의도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 판결이 안장 제한 기준(내란·반란죄로 금고 1년 이상 실형 확정)을 비켜가게 하면서, 사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법적 무죄와 역사적 평가가 정면으로 엇갈리는, 이 루트에서 가장 상징적인 사례 중 하나다.
황영시·차규헌 — 확정판결 "후" 사망해 국립묘지에 가지 못한 두 사람
1군단장·수도군단장으로 반란에 적극 가담했던 두 사람은 1997년 대법원에서 반란·내란 관련 유죄가 최종 확정됐다. 유학성·박준병과 달리 이들은 확정판결 "이후"에 사망했다 — 그 순서 하나 때문에 국립묘지법상 안장 제한 대상(내란·반란죄로 금고 1년 이상 실형이 확정된 사람)에 해당해,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않았다. 같은 반란에, 같은 재판에 넘겨졌던 사람들의 운명이 "확정판결과 사망 중 어느 것이 먼저인가"라는 우연에 갈렸다는 사실이야말로, 현행법의 허점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전두환 — "죽어서도 갈 곳 없는" 사람, 4년째 자택에 있다

내란·반란죄로 무기징역이 확정됐기 때문에, 전두환은 전직 대통령임에도 국립묘지 안장이 법률상 불가능하다. 2021년 11월 사망 후 화장된 유해는 유골함에 담긴 채 서울 연희동 자택에 임시 안치됐다. 유족은 그의 회고록 속 "북녘땅이 보이는 전방 고지에 백골로라도 남고 싶다"는 뜻에 따라 2023년 경기 파주 문산읍의 땅을 가계약했으나, 지역 주민과 정치권의 거센 반대로 계약이 무산됐다. 2025년 9월 기준, 사망 4주기를 앞두고 유족 측은 연희동 자택 마당에 영구 봉안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이 죽어서 묻힐 곳조차 구하지 못한, 전례 없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노태우 — 국가장으로 치러졌지만, 국립묘지는 아니다

노태우 역시 12·12 군사반란 및 5·18 관련 유죄가 확정된 전직 대통령이라 국립묘지 안장 자격이 없다. 다만 전두환과 달리 국가장으로 장례가 치러졌고(주민등록상 거주지 화장 비용과 국가장 주관 비용만 정부가 지원),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한 뒤 경기 파주 검단사에 임시 안치를 거쳐 최종적으로 파주 동화경모공원(사설 묘지)에 안장됐다. 국립묘지가 아닌 민간 묘지라는 점에서 전두환과 마찬가지로 안장 제한 원칙이 지켜진 사례이지만, 국가장이라는 예우는 함께 받았다는 점에서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국가의 태도가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장태완 — 반란에 맞선 사령관, 가해자들과 같은 묘역에 잠들다
12·12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으로 반란군 진압을 시도했던 장태완은 실패 후 서빙고 대공분실로 끌려가 45일간 조사받고 강제 예편했다. 훗날 그는 영화 「서울의 봄」에서 정우성이 연기한 "이태신"의 실제 모델이 됐다. 2010년 사망 후 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 132호에 안장됐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장군묘역 저편에는 반란 가담자 정동호(장군2묘역 064호)가, 그리고 장군1묘역에는 반란을 주도한 유학성(002호)과 5·18 유혈진압을 승인한 진종채(003호)가 나란히 잠들어 있다. 반란에 맞선 이와 반란을 일으킨 이가 같은 언덕, 걸어서 몇 분 거리에 함께 묻혀 있는 셈이다 — 이 물리적 인접성이야말로 "현충원의 역설"이라는 이 루트의 제목이 가리키는 풍경 그 자체다.
김오랑 — 반란군에 맞서다 숨진 소령, 뒷산에 암매장됐다가 현충원으로
정병주 특수전사령관을 체포하려는 반란군에 홀로 맞서다 총격을 받고 전사한 김오랑 소령(사후 중령 추서). 유해는 부대 뒷산에 암매장됐다가 뒤늦게 수습됐다. 아내는 남편의 죽음에 충격받아 실명한 뒤 실족사하는 비극을 겪었다. 훗날 반란 가담자였던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목숨 바쳐 직무를 수행한 군인에게 그런 처사가 있을 수 있느냐"며 부대장으로 장례를 다시 치르게 하고 현충원 안장을 도왔다는 증언이 있다 — 가해자 내부에도 최소한의 군인정신에 대한 인식은 남아 있었다는, 이 사건의 복잡한 단면이다. 김오랑의 안장 자체는 어떤 논란도 없다. 문제는 그의 죽음을 부른 이들 상당수가 지금 같은 국립묘지에 함께 있다는 사실이다.
20년째 폐기되는 법안 — 국립묘지법 개정의 실패사
2005년 노무현 정부 시기 17대 국회 이후, 친일·반란 가담자의 국립묘지 안장을 제한하거나 이미 안장된 이들을 이장할 수 있게 하는 법안이 국회가 새로 구성될 때마다 거듭 발의됐다. 그러나 20년 가까이 단 한 번도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했다 — 매 국회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되는 패턴이 반복됐다. 보훈부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이들도 독립운동이 아닌 다른 자격(군 복무 등)으로 안장됐으므로 법적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소급 입법의 위헌 소지"라는 반론과 함께 유지해왔다. 22대 국회에도 관련 법안이 발의됐지만 2026년 기준 20개월 넘게 상임위 심사조차 받지 못한 상태다.
"12·3 비상계엄 가담자도 현충원에 묻히나" — 새로 열린 질문
2026년 5월, 5·18 46주년을 맞아 국립대전현충원 현황을 점검한 언론 보도는 새로운 우려를 제기했다 —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사태 관련자들도 향후 재판 결과와 사망 시점에 따라, 12·12 가담자들과 똑같은 경로로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행 국립묘지법의 허점(무죄판결·확정 전 사망·훈장 미취소 시 안장 가능)이 그대로 남아 있는 한, 이 루트가 보여준 45년 전의 패턴이 오늘의 사건에도 똑같이 되풀이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현충원의 역설은 과거사가 아니라, 현재진행형 제도의 문제다.
언덕이 던지는 질문
나라를 위해 스러진 이들과, 나라를 배신했거나 헌정질서를 무너뜨린 이들이 같은 국가의 이름으로 같은 언덕에 함께 잠들어 있다. 정부는 12명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공식 결정했으면서도 그 이름들을 국립묘지 밖으로 내보내지 못하고 있고, 13명의 반란 가담자는 유죄와 무죄, 확정과 미확정 사이의 우연한 경계선 덕분에 이 자리에 남아 있다. 이 루트가 보여준 것은 결론이 아니라 질문이다 — 국가가 누구를 예우하고 누구를 기억할 것인가는, 법의 형식적 공백 앞에서 20년째 답을 미루고 있는 질문이다.